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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7. 이름 없는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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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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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9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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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2

   지금부터 26년 전, 2000년 대희년 성탄 방학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있는 라구사 베네딕도회 수녀원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수녀원은 지속적인 성체흠승 수녀원으로서 24시간 성당에 성체를 현시해 놓고 순번으로 돌아가며 끊이지 않고 성체조배를 합니다. 

   대개 유럽의 전통적인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봉쇄수녀들로서 입회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한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평생을 보냅니다. 저희와 같은 휴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극히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의 전 삶을 주님께 투신합니다. 

   제가 방문했던 그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원도 산책할 공간도 없고 오직 건물 하나와 수백 년 된 성당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성당과 식당, 작업장 등 공동 공간과 독방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한 노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94세로 그 공동체에서 최고령자였습니다. 원장 수녀님이 그 수녀님을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14살에 현재의 수녀원에 들어와서 89세 때까지 75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가장 힘들고 취약한 시간인 새벽 2~4시까지 같은 시간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5년 전에 건강이 악화하여 현재 병실에서 지내게 되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지 의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누가 한 몇십 년 동안 그렇게 했다고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75년 동안, 그것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인간의 의지로 어떻게 가능한가? 제게는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 수녀님이 살아 있는 성녀와 다름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녀원의 봉쇄구역 안에 철저히 감추어져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투신한 그분은 분명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며 성녀라 확신합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삶 속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한평생을 바쳐온 그분의 삶 자체가 바로 위대한 순교라 생각됩니다. 

   과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 곳곳에는 감추어져 있는 이름 없는 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랑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보이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눈이 멀어서 남들이 보면 어리석은 행동도 영웅적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무언가에 홀려 선뜻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다고 봅니다. 

   역사 안에는 사랑에 눈먼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특히 이 눈먼 증이 가장 심했던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에 눈이 먼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수녀원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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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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