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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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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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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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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7

이 글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바오로의 뜨락(2010·여름) 제114호 34-39쪽에 실렸던 글입니다.


말씀과 함께 살기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_ 성 베네딕도회



   평소 깜깜무소식이던 지인에게 갑자기 연락이 오면 반가움과 동시에 모종의 경계심이 들곤 한다. 어떤 저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대개는 청탁성 전화일 경우가 많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도 필자의 예감이 적중했다. ‘바오로의 뜨락’으로의 초대였다. 아직 바오로의 뜨락에 들어가 거닐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필자에게는 여간 부담스런 초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 부담 없이 자유롭게 거닐어 달라는 정중하고 간곡한 초대를 일언지하에 매정하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일단 초대에 응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걱정이 가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첫 발을 디딜 것인지 고민하다 그냥 용감하게 들어가 자유롭게 거닐기로 했다.


   이번 호의 주제가 ‘말씀과 함께’라고 하니, 이 글의 제목을 ‘말씀과 함께 살기’로 정해보았다. 우선 말씀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란 ‘성경말씀’, 곧 ‘하느님 말씀’을 뜻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말씀과 함께 산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하느님 말씀에 따라서 산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왜 말씀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말씀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영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말씀 없이 우리는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고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마침내 죽음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말씀 안에 머물며 말씀과 함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말씀과 함께 살 수 있는가?


   말씀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말씀 안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먼저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참된 대화가 이루어지고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다. 듣지 않고서 올바른 응답이 이루어질 수 없다. 대화는 들고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 라고 표현한다. 이 정의는 아주 인격적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 역시 들음(lectio)으로써 시작된다. 이 대화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 곧 말씀과 함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무엇보다도 잘 들어야 한다. 경청하는 자만이 말씀 안에, 말씀과 함께 살 수 있다. 잘 듣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침묵하라. 듣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침묵 중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할 말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남의 말을 들으려하기 보다는 자기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통교가 제대로 안 되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침묵의 목적은 듣기 위함이다. 하지만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외적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 정신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의 침묵, 내적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성경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 일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암기하라. 침묵 중에 경청한 하느님 말씀을 우리 기억 속에 저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항상 말씀 안에 머물고, 말씀과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고대 수도교부들은 하느님 말씀을 수시로 암기했다. 고대인은 현대인보다 암기에 능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오늘날 우리처럼 개인이 성경을 소유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막교부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이나 전체를 통째로 암기하여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꺼내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는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서 수도승들 간의 대화가 성경에 대한 직접 혹은 간접 인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수도승은 성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에피파니우스는 “참된 수도승의 마음속에는 늘 시편과 기도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기억 창고에는 하느님 말씀으로 가득했다. 하느님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여 온갖 세속적인 생각과 헛된 마음을 몰아냈다. 


   셋째, 되뇌어라. 기억에 저장한 말씀을 되뇌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듣기 위함이다. 반추동물이 여물을 되새김질 하듯이 말씀을 계속 되새김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항상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게 된다. 고대 수도교부들에게 있어서는 이 되새김(ruminatio)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묵상(meditatio)이었다. 따라서 묵상의 본래 의미는 침묵 중에 생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되뇌는 것이었다. 이것을 그리스말 전문용어로 멜레테(meletẽ) 수행이라 한다. ‘멜레테’란 멜레탄(meletân)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본래 성경의 어떤 구절이나 말마디를 소리 내어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4세기 사막 수도자들은 손노동을 할 때나 길을 갈 때나 무슨 일을 하든지, 또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느님 말씀을 되뇌었다. 파코미우스 수도자들은 일터나 성당 혹은 식당 어디서나 성경 구절을 되뇌었다고 한다. 압바 시소에스는 ‘주 예수님, 제 혀에서 저를 구하소서!’ 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반복해서 읽었다. 스케티스에 오기 전 큰 범죄를 저질렀던 마카리우스 역시 비슷한 기도문을 반복했다. ‘저는 죄 많은 인간이오나, 당신은 하느님이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처럼 사막교부들에게 있어 이 멜레테 수행은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항상 말씀 안에 머물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은 모두 말씀을 경청하는 단계이다. 듣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참된 대화라 할 수 없다.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역시 우리의 응답이 필요하다. 이 응답이 바로 기도(oratio)이다. 말씀과 함께 산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끊임없는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삶은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항구한 이상이다. 


   기도를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고 했는데, 이는 완전한 의미의 응답은 아니다. 우리의 응답은 말씀을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참되고 완전한 응답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말씀과 함께 사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위에서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인격적인 표현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인격간의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기에 우리가 말씀을 듣고 삶을 통해 응답하는 이 전 과정이 바로 기도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언제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기도, 곧 하느님과의 멋진 대화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순종’이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순종이란 누구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 곧 순종의 삶이 바로 기도의 삶이고 말씀과 함께 사는 삶의 의미이다.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 중에 말씀을 듣고 늘 말씀 안에 머물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순종의 삶은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 줄 것이다. 불순종으로 인해 우리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듯이 순종을 통해 우리는 그분께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순종을 무기로 하여 하느님을 향한 멋진 항해를 이어가기를 희망해 본다. 


   이제 바오로의 뜨락을 빠져나갈 시간이다. 예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필자를 이 낫선 뜨락으로 선뜻 초대해주어서 감사하고 또 이 뜨락에서 한바탕 자유롭게 노닐 수 있어서 감사하다.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의 은총이 풍부히 넘치기를 기원하며...



2010년 4월 복사꽃이 환하게 피던 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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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안나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말씀에 잠긴 성 베네딕도」 , 테라코타, 28×2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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