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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12. 주객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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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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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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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9

  임제 의현이라는 유명한 중국 선사禪師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평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살불殺佛 살조사殺祖師”,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언뜻 들으면 섬뜩하고 살기마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 어떠한 것에 얽매여 본질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뼈있는 가르침입니다. 임제 선사는 여기서 무의도인無依道人, 즉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주체적, 자립적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일은 구도의 길에서 또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입니다. 예컨대,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대한 의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되 그 겉모습을 보고 거기에 천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바라봐야 할 본모습,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의 조각상을 숭상하게 되고 조사 자체와 그의 가르침에만 의존하게 되니 결국 부처의 마음을 놓치게 되고 자기 스스로의 체험 없이 늘 겉만 맴도는 것입니다.  


  선종의 4대 핵심 교리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습니다. 대충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깨달음은 문자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전을 통해서도 아니고, 바로 마음을 직시함으로써 참된 진면목을 보게 되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책이나 경전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그것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수행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모든 사물 안에는 불성이 있고 바로 사물의 마음, 사물의 핵심을 직접 바라볼 때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종의 이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 안에는 하느님 현존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안에도 그분을 닮은 참된 인간 본성(眞我)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우리 영성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사물 안에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는 아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깨달음 자체가 우리 삶을 인도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문자로 표현된 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릇일 뿐입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 곧 하느님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 가르침의 핵심에 늘 천착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건 간에 직접 사물의 본질을 향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늘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됩니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강을 건너라고 만든 뗏목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수단, 방편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주객전도의 우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내면의 깊은 뜻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천당, 지옥 불신”과 같은 표어가 나도는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 신앙, 문화, 민족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갑니다. 함께 가지만 결국 혼자 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내 길을 대신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이 무의도인의 자유로움으로 홀로 우뚝 서서 타인의 지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고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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