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친교
이 글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바오로의 뜨락(2023·여름) 제140호 8-14쪽에 실렸던 글입니다. 수도공동체든 본당공동체든 가정공동체든 사람이 함께하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기에 공유해 봅니다.
공동체 친교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_ 성 베네딕도회
머리말
바오로의 뜨락과의 인연이 참 질기다. 끊어질만 하면 다시 이어지니 말이다.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흔적을 남기고 그 뜨락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8년 만에 또 들어와 거닐고 있다. 이번에 부탁받은 주제는 ‘공동체 친교’다. 늘 강조되어 왔던 주제라 그리 생경하지는 않지만, 다시 부각된 것을 보면 공동체 친교가 실생활에서 그리 쉽지 않음을 방증해주는 것 같다. 사실 필자에게도 친교는 늘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다행히 여러 해 전에 이에 대해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해 둔 내용이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나누고자 한다.
공동체 생활의 이유
공동체 생활의 첫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unum in Christo)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란 한 몸을 뜻하는데,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지체들이다. 지체들이 머리를 중심으로 모여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이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좋은 모델이다(참조: 사도 2,42-47; 4,32-37).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기도와 봉사에 전념하면서 한 마음 한뜻이 되어 나눔과 친교의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것이 초기 공동체 생활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우리가 함께 사는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처럼 그들 각자도 하느님이 선택하시어 불러주셨기에 지금 이곳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사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신앙 안에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 공동체다.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선택해서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 생활하는 끼리끼리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우리가 함께 사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는 채워져야 할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완전하다면 함께 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부족하기에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서로의 부족을 채워가며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결핍된 존재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 생활은 바로 이것을 전제한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없다. 누구나 나름의 여백을 지니고 있다. 이 여백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채워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공동체 생활의 의미일 것이다.
공동체 친교의 걸림돌
공동체 생활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며 점차 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디딤돌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공동체 생활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의 경험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 친교의 걸림돌은 무엇보다도 서로의 차이와 다름에서 온다. 서로 어떤 차이가 없다면 갈등도 반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배경도, 성격도 취향도, 관점도 생각도, 생활방식도 각자 다 다르다. 이러한 다름 혹은 차이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게 되고 늘 ‘저 사람은 왜 저런가?’라는 의문을 입에 달고 다니게 된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생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다양성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의 고유성이다.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양성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의 고유성이 침해된다고 느낄 때 우리는 힘들어 한다. 이처럼 각자의 고유성과 차이점이 우리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고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강한 에고는 공동체 친교의 또 다른 걸림돌이다. 모든 것의 척도도 판단기준도 ‘나’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생각과 태도 때문에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애(philautia)로부터 나온다. 자기애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이고 우리가 묶여 있는 사슬과도 같다. 자기애가 강할수록 공동체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약할수록 더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에고 혹은 거짓 자아)로부터, 곧 ‘자기애’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끝으로 자존감 부족도 공동체 친교의 걸림돌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조윤제의 다음 말은 이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을 때 화를 내지만 실상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쉽게 자존심을 다치게 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보고, 자기 삶에 확고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사소한 자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조윤제, 『다산의 마지막 공부』, 청림출판 2018, 134) 자존감이 부족할 때 우리는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늘 피해의식에 젖어 살 수 있다.
공동체 친교의 디딤돌
공동체 친교의 첫 번째 디딤돌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다. 공동체의 일치는 결코 각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부정이나 말살이 아니다. 일치는 획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개인의 고유성만 주장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다보면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공동체 일치는 어렵다. 고유성과 공동체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각각의 고유성은 존중하되 그것은 공동체의 공유비젼과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고유성은 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거짓 자아의 투영이 될 위험이 있다. ‘거짓 나’(僞我)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우리는 ‘참 나’(眞我)를 향해 진일보할 것이다.
디트리히트 본회퍼는 짧은 공동체 생활을 체험한 후 ‘각자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참된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각자의 이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바로 ‘거짓 나’의 이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한다. 공동체 생활에서 우리는 ‘나의 이상’이 아닌 ‘우리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 때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친교의 두 번째 디딤돌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동체 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서로의 다름이다. 하지만 이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공동체 생활은 늘 갈등과 반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삐걱거리게 된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위한 필수사항이다.
우리는 각자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선물을 받았다. 내가 좋은 선물을 받았듯이 다른 사람도 내게 없는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때 우리는 나름의 자존감을 갖게 되고 더 이상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존감이 없을 때 우리는 남과의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될 것이다. 각자 자존감을 갖고 자기가 받은 선물에 감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때 비로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공동체 생활에는 내려놓기, 혹은 자기포기가 전제된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도 없고 참된 공동체 생활도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내려놓기는 공동체 친교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자기 포기는 장상에 대한 순종과 함께 사는 형제들에 대한 순종과 양보로 구체화된다. 공동체 생활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대한 포기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포기는 결코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말살이나 억압이 아니라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한 자발적인 양보다.
공동체 친교의 또 다른 디딤돌은 ‘함께’와 ‘홀로’의 조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함께 있음’이 다른 이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침묵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물러나 고독과 침묵 중에 머무는 것이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늘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고독과 침묵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닌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홀로 있음’은 우리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끝으로 공동체 의식 함양도 공동체 친교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지금 사는 공동체와 형제자매들이 ‘내 집’, ‘내 가족’이라는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주인의식도 책임의식도 없이 늘 객客과 같이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 있을 때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 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순간과 장소에 머무는 것은 중요하다. 때론 함께 하는 것이 성가시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현존하는 그 자체도 애덕이고 자기를 비우는 수행이다.
맺음말
‘공동체 친교’라는 주제로 참된 공동체 친교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먼저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에서 출발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 그리고 그 해결 방안을 필자 나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시해 보았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들로 부르심을 받았고 각 지체는 따로 떨어져서는 불완전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전한 몸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각 지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초래되는데,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양보하려는 자세가 있을 때 공동체 친교는 가능하다. 끝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공동체성의 조화를 통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 하느님과 홀로 하는 고독과 형제들과 함께 하는 친교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 끊임없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참된 공동체 친교의 길로 점차 나아가리라 믿는다.
* 미국 뉴맥시코 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 공동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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